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문단 편집) ==== 발탁 ==== 기록에 그의 이름이 분명히 등장하는 것은 서기 383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샤한샤]]) [[샤푸르 3세]]와의 평화조약을 위해 일단의 사절단을 파견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스틸리코는 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아르메니아 문제를 논의하는 교섭 현장에 참여하여 제국의 위신을 지키는데 공헌했다고 한다. 359년 출생설을 믿는다면 불과 24살, 365년 출생설을 믿는다면 18살, 어쨌든 아무리 높게 잡아도 20대 초반밖에 안 되었을 젊은이가 군사 문제도 아니고 외교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때 그가 교섭에 있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스틸리코가 황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를 '황제 호위대장'(''comes stabuli'')으로 승진시키고, 이어서 자신의 질녀이자 양녀이기도 했던 세레나(Serena)를 그와 결혼시킴으로써 그를 황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90년경에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테오도시우스 황가에서 공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사실상 세레나뿐이었고, 또한 세레나에 대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가 두터웠음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히 파격적인 대우다. 클라우디아누스를 비롯한 동시대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세레나는 분명히 [[테오도시우스 왕조|테오도시우스 황가]]와의 인연을 원하는 여러 유력자들이 탐내는 결혼 대상이었고, 상당한 경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무렵 제국은 어쨌거나 [[게르만족]]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황가에 굳이 게르만족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고 게르만족에 대한 반감조차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결혼은 철저하게 그가 보여준 실력을 염두에 둔 혼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략 서기 384년에서 385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결혼은 [[정략결혼|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의향이 강하게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이후 황궁과 원로원에서 스틸리코를 꾸준히 지지한 세레나의 행보를 보면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부부로서의 사이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던 듯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2녀가 출생하는데, 아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숙부로 추정되는 이의 이름을 따서 에우케리우스(Eucherius), 두 딸 또한 테오도시우스 가문 여인들의 이름인 [[마리아(호노리우스의 아내)|마리아]](Maria)와 [[테르만티아]](Thermantia)로 명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